2014년 4월 14일 월요일

곤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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袞龍袍
곤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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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룡포를 입은 영조 어진


황룡포를 입은 고종 어진


홍룡포를 입은 영친왕 초상

임금이 시무복으로 입던 옷. 한국사람들이 흔히 왕이 입는 옷 하면 떠올리는 옷이 이 옷이다.

Contents

1 개요
2 종류
3 관련 이야기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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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복, 또는 용포라고도 한다. 단령 형식으로 되어있는 웃옷이다. 은 동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우 성스러운 동물인데, 은 하늘의 자식이기 때문에 용으로 비유를 하였다고 한다.[1] 노란색, 또는 붉은색 비단으로 지었고, 황색 단(緞)이나 사(紗)에 붉은색 안을 넣었으며, 가슴, 등, 양어깨에는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을 붙였다고 전한다.[2]

참고로 신라 후기~고려 시대 국왕들은 황색 단령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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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종류 

왕의 보는 오조룡(五爪龍), 왕세자의 보는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의 보는 삼조룡(三爪龍)으로 하였다. 곤룡포를 입을 때는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옥대(玉帶)를 매며, 목화(木靴)를 신었다. 여름에는 대홍사(大紅紗) 곤룡포를 주로 입었는데, 조선시대 왕의 곤룡포는 주로 빨간색이었다. 이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향이 큰데[3], 중국의 황제는 세계의 중심 중의 중심이란 의미에서 황색의 의복을 입었다고 한다. 황색은 곧 황제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조선의 왕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피하고, 명나라 친왕과 동격인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었다고 한다.[4] 이 대목을 두고 "사대주의 쩌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참고로 왕세자의 용포는 검은색[5]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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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명나라 선덕제, 우측은 그의 아들인 정통제의 어진으로, 원래 명나라의 황룡포도 조선의 홍룡포처럼 몸 앞뒤와 양 어깨에 용보를 붙이는 정도였지만, 정통제가 토목보의 변으로 폐위되었다가 천순제로 복위하면서 황제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용보의 갯수도 늘이고 원래 곤복에만 붙이던 12가지 문양[6]을 곤룡포에도 붙이도록 했다. 그래서 천순제 이후 명나라 황제들의 어진을 보면 곤룡포가 화려하다 못해 어지러울 정도.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 원래는 다른 왕들처럼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초상화도 있었다고 한다.# 참조 사극 중에서는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가 처음에는 청색 곤룡포를 입다가 홍색으로 바꾸는 것으로 설정했고, 왕의 남자에서는 연산군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청색 곤룡포를 입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다만 명나라도 초기에 청룡포를 입었고, 고려 왕실(우왕 이후)도 청룡포를 입었으므로 이를 계승한 것이며, 태종 3년(혹은 1년)에 조선 옥새를 받고는 그때부터 세자까지 청룡포를 입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홍룡포를 입기 시작한 것은 세종 26년(1444년) 부터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홍룡포는 황태자의 용포가 되었고, 황제는 황룡포를 착용했다.[7] 참고로 영친왕이 이방자 여사와 결혼한 후 귀국해 순종황제 부부를 배알할 때 입었던 것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곤룡포 실물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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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이야기 

세종 시절, 신숙주는 이 곤룡포를 이불로 사용한 적이 있다. 알다시피 세종이 갸륵히 여겨 덮어준 것이긴 하지만, 신숙주에겐 왕보다 먼저 피곤해서 잤다는 정신적 벌칙(…) 본격 커맨드마패 능욕

인조 시절,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도망치다가 피로와 추위에 쓰러졌다. 하필이면 수행원들도 얼마 안 되었고, 그들도 추위 때문에 왕을 모시고 떠나기 힘들었다.
그 순간, 근처 민가에 살았던 서흔남이 그를 발견하고 득달같이 달려가 임금을 업고 자기 집으로 모셨다. 따뜻한 곳에서 몸을 덥히니 임금은 정신을 차렸고, 그 서민을 치하하면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서민으로서는 일자무식인지라 뭐라 소원을 제대로 빌 수도 없었는데, 높으신 분의 옷이니 좋겠거니 생각하여 "전하께서 입고 계신 곤룡포를 주시옵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인조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곤룡포를 벗어서 주었다.
덕분에 그 서흔남은 곤룡포를 가보처럼 여겼고, 서흔남이 죽을 때 곤룡포도 같이 묻었다고 한다....잠깐 가보라며????가보처럼 여겼다고 했지 가보라고 한적은 없잖아 그리고 궁중의 의상 제작자들은 또 노가다를 해야 했다

포청천 시리즈 가운데 '이묘환태자' 에피소드의 결말에서, 송인종은 자신이 생모를 돌보지 못한 불효를 저질렀으니 그 죄를 어떻게 벌줘야 하는지 묻고 공손선생이 이에 곤장 수십대에 해당한다고 대답한다. 이에 황제가 스스로 곤장을 맞으려 하자, 공손성생은 곧바로 '황상의 곤용포는 곧 황상의 옥체와 같으시니 용포의 장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라는 굉장한 꼼수(...)를 말하고 송인종 대신 송인종의 용포가 곤장을 맞게 된다. 이묘환태자는 이 때문에 '타용포'라는 제목을 가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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